명상·최면

[스크랩] 최면을 공부한다는 것

살라이마리꼼 2008. 2. 24. 14:48
최면을 공부한다는 것...
 

최면을 공부한다는 것은

단순히 최면의 원리와 기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흔히 사람들은 최면술이라고 말한다. 나는 늘 이것에 반대해왔다.

최면을 최면술이라고 하면서 우리는 최면의 격을 떨어뜨리는 것은 아닐지...

괜히 노파심에서 그런 생각을 해본다.

"~술" 이라고 하면 왠지 좀 격이 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상술, 마술, 요술, 인기술 등의 단어에서 사용되는 술의 경우처럼

뭔가 밝거나 건강하지 못하며 썩 그렇게 고급스러워 보이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물론 의사들의 의술이나 인술이라는 말은 괜찮아 보인다. 그 경우는 예외인 것 같으나

나머지의 경우는 하여간 좀 어슥한 냄새, 그리고 당당하지 못하거나 학문적이지 못한

냄새도 나는 것이 사실이다.

 

하여, 나는 최면술이라고 부르지 말것을 제안한다.

서양의 학문이 들어올 초기에 동양사람들 (특히 일본인들이라고 생각함)이

서양의 최면 개념인 hypnosis를 최면술이라고 번역한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이제는 바꾸어야 한다고 여긴다.

 

최면을 공부한다는 것은 술을 공부하는 것도 아니요 단순히 최면거는 방법을

공부하는 것도 아니다.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곧 자기를 공부하고 인생을 공부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일찌기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아라"고 말했다.

그 말은 우리가 정말로 우리 자신을 잘 모른다는 의미가 된다.

자신을 알 수 있는 좋은 방법, 그것이 바로 최면이다.

그래서 최면공부를 통해서 우리는 자신을 배우고 익힌다.

자신속에 감추어진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 그러한 것은 사실 원래부터 있는 것이지만

오래동안 잊혀졌던 것이다.

그러나 최면을 통해서 찾을 수 있다. 회복할 수 있다.

 

그리고 최면을 통해서 우리는 인생을 배우고 삶을 배운다.

왜냐하면 내 자신, 특히 속에 있는 마음이나 무의식이 만들어내는

삶의 모습... 이런 것들이 인생이 되기때문이다. 그러한 마음에 대해서

무의식에 대해서 잘 모르기때문에 인생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마음에 대해서, 무의식에 대해서 알고 배움으로써 우리는 인생을 배운다.

삶을 배울수 있다.

일체유심조라고 하듯이 마음의 중요함을 누구나 안다.

하지만 그 마음에 대해서, 마음을 다룸에 대해서는 별로 배우고 공부할 기회가 없다.

최면은 바로 그러한 것을 배운다.

그러므로 최면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공부가 아닐까?

 

최면은 단지 인생과 삶을 배우는 것만 아니다. 초월적인 무엇도 배운다.

그래서 자연도 배우고 우주도 배우고 신이나 영성의 차원도 배운다..

왜냐하면 우리의 무의식 속에는 초의식이라고 할만한 더 높은 차원의

우주적이며 초월적인 의식도 있기 때문이다.

최면을 통핵서 그러한 의식을 일깨우고 드 높일 수 있다.

그렇기에 삶과 죽음의 차원도 최면을 통해서 배울 수 있다.

 

결국 최면을 공부한다는 것은 삶에서 가장 훌륭한 공부가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최면을 배우자.

출처 : 생활속의 명상도량 자비선원
글쓴이 : 연꽃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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