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탐구
마음(MIND)
마음이 무엇인가? 만약 마음을 알기 위해서 찾는다면 마음이라고 할 수 있는 분리된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은 생각의 꾸러미에 불과하다. 마음은 '나'라는 생각에 좌우된다. '나'라는 생각이 바로 마음이라는 것을 알라. 마음이라는 이름의 실체는 없다. 생각이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생각이 시작된 그 무엇을 추측할 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마음이라고 이름한다.
마음이 내부를 향하면 참나이고 마음이 외부로 향하면 에고(ego)와 삼라만상이 된다. 마음은 참나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독립적인 마음의 존재는 없다. 참나는 마음 없이도 존재하지만 마음은 참나없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은 오직 생각의 집합체일 뿐이다. 생각은 에고, '나'라는 생각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그래서 모든 생각은 에고에 의하여 채워진다. 마음의 동요는 생각의 상(象)으로 인한 에너지의 소실로부터 일어나는 허약함이다. 마음이 하나의 생각에 집중될 때 에너지는 보존되고 마음은 더 강해진다. 방이 어두워지면 방을 밝힐 램프가 필요하다. 그러나 태양이 떠오르면 램프가 없어도 보이기 때문에 그것이 필요가 없어진다. 태양을 보기 위해서는 그 자체가 빛을 내고 있기에 어떠한 램프도 필요치 않다. 마음에 있어서도 그와 같다. 마음의 반사된 빛은 사물을 인지하는데 필요하다. 그러나 심장을 보기 위해서는 마음이 그것을 향해 돌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마음은 그 속에서 사라지고 심장만이 밝게 빛난다.
에고(EGO)
아함브리티(나라는 생각)의 근원을 탐색하는 것은 에고의 여러 형태 중 하나에 대한 뿌리를 찾는 것만이 아니고 '나는 존재한다'는 생각이 일어나는 바로 그 근원을 찾는 것이다.
기능적 관점에서 보면 에고는 오직 한가지의 성격을 가진다. 에고는 순수의식인 참나와 수동적인 육체사이에서 매듭과 같은 기능을 한다. 그러므로 '의식과 수동적 몸 사이의 매듭'으로 불린다. 에고의 근원에 대해서 탐색하면 에고의 본질인 의식의 측면을 안다. 이런 이유때문에 참나탐구는 참나의 순수의식에 대한 깨달음으로 끌어져야만 한다.
'나는 누구인가'의 탐구에서 '나'는 에고이다.
그 질문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 에고의 근원이며 시초인가? 이다.
그대가 해야할 일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지 이렇게 저렇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아탐구의 방법은 한마디로 요약해서 '고요히 존재하라'이다. 고요는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내가 '이러 이러한 사람이다'라는 관념을 버리는 것을 뜻한다.
참나탐구(SELF ENQUIRY)
그대는 마음이며 자신을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은 단지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특별한 생각들의 이면에는 그대 자신인 '나'라고 하는 일반적인 생각이 있다. '나'라는 생각을 최초의 생각이라 하자. 그래서 이 '나'라는 생각을 붙잡아라.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기 위해서 물어 보라.
그대가 모든 생각을 계속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나'라는 생각에 매달린다면, 그대의 관심이 단 하나의 생각에 집중되어 다른 생각을 물리치게 되어 자동적으로 모든 생각들이 사라진다.
지속적이지 못하더라도 자주 질문하라. 그리고 내적으로 탐구하라.
만약 그대가 생각의 길을 간다면 생각에 휩쓸려서 끝없는 미궁에 빠져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혼란 속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 탐구하라. 조금만 수련을 해보면 그리 힘들지 않을 것이다. 만약 한번 시도를 해보면 그게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의심하는 자와 그 근원이 밝혀진다면 모든 의심은 사라질 것이다. 의심 자체를 없애는 것은 소용이 없다. 하나의 의심을 제거하면 또 다른 의심이 일어날것이고 그렇게 의심은 끝없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이 밝혀진다면 모든 의심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대는 '나'를 말하면서 여전히 '나'를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어느 누가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할 수 있는가? 그것은 어리석지 않은가? 늘 존재하고, 결코 달아날 수 없는 '나'에 대해서 그대가 어떻게 알지 못할 수 있는가?
'WHO AM I?' AND 'WHENCE AM I'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탐구에 앞서 호흡을 지켜봐야 될 지에 대해서는 사람의 재능과 습성에 따라 달라진다. 탐구를 하면서 그것을 조절하고 집중할 수 있는 정신적 힘을 가지지 않은 자는 호흡을 지켜보도록 조언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호흡을 지켜봄으로써 마음을 통제하에 두기 때문이다. 사실상 탐구의 방법 면에서 '나는 누구인가'만이 아니고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를 더 적절하게 여기는 것은 우리의 내면에서 '나'라는 생각(에고, 마음)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를 알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방법은 아무 목적이 없이 호흡을 지켜보는 것을 포함한다. '나'라는 생각과 호흡은 같은 근원으로부터 일어나므로 우리가 생각의 근원을 지켜볼 때 필연적으로 호흡의 근원도 지켜보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를 탐색하는 것은 실제 '나'라는 생각의 근원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대는 그 외 딴 생각, 예컨대 '나는 몸이 아니다' 등과 같은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나'라는 생각의 근원을 찾는 것은 모든 다른 생각들을 끝내는 수단이 된다. 우리는 '나'라는 생각에 모든 주의를 집중시키는 외에 다른 생각이 들어설 틈을 주어서는 안된다. 생각들이 일어나면 그 생각이 누구로부터 일어나는지에 대해 물어서 만약 그 대답이 '나'라면 이 '나'가 누구인가? 그것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를 계속 탐구함으로써 생각은 사라진다.
지각, 기억 또는 그 외 다른 모든 경험들은 결국은 '나'에게로 이른다. 그대가 잠자는 동안에는 경험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는 동안에도 그대는 여전히 존재했었다. 그리고 그대는 지금도 존재한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이 가고 올 동안에도 '나'는 계속됨을 보여준다.
'나는 누구인가?'는 '나'라는 생각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를 집중해서 찾아야만 함을 뜻한다. 바깥에서 그것을 찾는 대신 그대 내면에서 찾아라. 그리고 나라는 생각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를 보라.
모습, 소리, 어떤 물건이 있던지 아니면 텅빔이 있던지 간에 결코 마음을 두지 말라. 이 모든 순간에 그대는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 않은가? 텅빔의 순간조차도 그대는 그 텅빔을 말할 수 있도록 거기 존재해야만 한다. '그대'속에서 찾아지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에 대한 탐색이다.
자신을 아는것'인 '비차라'(Vichara:참나탐구)는 '시보함'(나는 시바다)이나 '소함'(나는 그것-신이다)의 방법과는 다르다. 나는 자아의 인식에 대해서 강조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대가 삼라만상과 그것의 신을 알려고 하기 앞서 먼저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소함' 명상이나 '내가 브라만이다' 명상은 많든 적든 정신적 생각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탐구는 실로 다른 어떤 명상법보다 더 우수하고 직접적인 방법이다. 자아를 위한 탐구의 흐름에 빠져들고 더욱 더 깊어져 가는 순간에 참나는 그대를 데려가기 위해 거기 기다리고 있다. 그 다음은 당신이 손을 대지 않더라도 그 어떤 것에 의해 이루어져야 할 것은 무엇이든 지 이루어지게 된다.
헌신(BHAKTHI)
헌신은 '당신이 모든 것입니다', '당신 뜻대로 이루어지소서'라는 상태에 도달했을 때만이 완전해진다. 헌신은 매우 쉽게 보이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기 입으로 '나는 헌신한다'라고 말한다면 자유로워 질 수 있고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그대가 헌신한 후에는 더 이상 싫거나 좋아함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대의 의지는 완전히 존재하지 않아야 될것이다. 그 자리에 신의 의지가 차지할 것이다.
무엇이 운명인가? 운명은 없다. 헌신하라, 모든 뜻이 이루어질 것이다. 신에게 책임을 지워라. 그대 스스로 짐을 지지 마라. 그렇다면 운명이 그대에게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은총이 탐색적 능력을 더 빨리 성취 시켜주지 않는지를 묻는다. 그것은 신에게 맡겨라. 무조건 헌신하라. 신은 헌신하는 자를 결코 버리지 않는다. 두 가지 중 한가지를 택해야 한다. 그대가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여 보다 강력한 힘에게 도와 달라고 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헌신하는 것 또는 불행의 원인을 탐구하여 그 근원에 들어가서 참나에 몰입하는 것 두 가지이다. 어느 길을 가든 그대는 불행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것이다.
헌신은 신의 자비에 자기 자신과 자신의 모든 소유를 포기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면 그 자에게 무엇이 남아 있는가? 아무 것도 없다. 그 자신도, 그의 소유물도 없다. 몸은 태어나고 죽는데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지만 마음을 신에게 맡기면 더 이상 그것에 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탄생과 죽음은 공포의 충격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놀라움을 일으키는 그 개인성이 어디에 있는가?
신의 뜻은 모든 시간과 상황에 널리 퍼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개인은 그 자신의 뜻대로 행동할 수 없다. 강력한 신의 뜻을 인지하라. 그리고 침묵하라.
만약 더 높은 힘에게 책임을 맡겨버리면 모든 일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땅위로 걷는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 우리가 한발을 올린 후 다른 발을 올려야 하는지 어떤 지점에서 멈추어야 하는지를 발을 딛을 때에 고려하는가? 걷는 것은 저절로 되어지지 않는가?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어 쉬는 경우도 같은 경우이다. 숨을 들이쉬고 내어 쉬는데는 아무 특별한 노력이 필요 없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꽤 많은 일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저절로 이루어진다. 만약 마음과 말과 몸으로 짓는 행위들이 신에 몰입되어진다면 우리 생의 모든 짐은 신이 떠맡게 된다.
- 라마나 마하리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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