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차 부자강의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꿈의 화신, 이순신
주말연속극 ‘불멸의 이순신’ 이라는 드라마를 보신 적 있죠?
1597년 8월, 감옥에서 풀려나 삼도 수군통제사로 복직한 이순신장군은 조정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명령을 받았습니다.
“현 조선 수군으로는 왜 수군에 도저히 승산이 없으니 육지로 올라가 종군하라.”
추상같은 임금의 명령에 이순신장군은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아직 신에게는 전선 열두 척이 있으니 죽을 힘을 다해 싸우면 기필코 승리할 수 있습니다.”
같은 해 9월, 이순신장군은 패잔병과 어부로 구성된 120명의 병사와 전선 열두 척을 이끌고 수천 명의 적병과 133척의 적선이 새까맣게 몰려오는 명랑으로 향했습니다.
개전 초기에 가졌던, ‘왜적을 격파해 나라의 수치를 갚겠다’ 는 자신의 꿈에 충실하기 위해 전세의 불리함이라든지 목숨의 위태로움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은 완벽하게 무시하고, 그야말로 ‘꿈’의 화신이 되어 죽음의 전쟁터로 달려간 것입니다.
나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아
1940년 8월, 히틀러는 전시 지령 제 16호 ‘바다사자 계획’을 발했습니다.
같은 달 13일, 영국 상공은 1,500여대의 독일 폭격기로 뒤덮였습니다.
폭격은 4개월이나 계속되었습니다.
독일 폭격기들이 런던 상공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은 처칠을 둘러싸고 이렇게 다그쳤습니다.
“폭탄 하나가 떨어질 때마다 우리 영국인 네 명이 죽어나가는 걸 모르십니까? 항복하십시오. 어차피 독일이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당신 책임입니다. 당신 고집에 대한 대가를 국민들이 처참하게 치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제발 이성적으로 판단하십시오.”
그 때마다 처칠은 방공호에서 뛰어나와 독일 폭격기들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들은 나를 이길 수 없어. 나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아,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잿더미로 변해 버린 조국, 불에 탄 시체들이 뒹구는 런던 거리, 거의 매일같이 전해져 오는 독일의 승전 소식... 현실은 독일에 승리하겠다는 처칠의 꿈을 가혹할 정도로 짓밟는 절망적인 사건들뿐이었지만 그럴수록 처칠은 큰소리로 자신의 꿈을 부르짖었습니다.
더 뜨겁게 타올라라
1995년, 중학생 축구 선수 김은중은 축구 연습 도중 안면에 불덩어리가 작열하는 듯한 충격을 받고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진찰 결과 축구공에 얻어맞은 그의 왼쪽 눈 망막이 파열된 것으로 나타났고 그는 망막 접합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치료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시력은 계속 나빠졌고 마침내 1997년, 김은중은 왼쪽 눈의 시력을 거의 잃게 되었습니다.
그는 입체감과 거리감을 상실하게 되었고 공이 2미터 앞에서 날아오는지 5미터 앞에서 날아오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축구를 그만두어야 함이 백 번 마땅한 그 때, 김은중은 오히려 축구선수의 ‘꿈’에 한층 더 강하게 다가갔습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프로 축구단에 입단한 것입니다.
축구선수로서는 사망선고나 다름없는 ‘실명’이라는 장애물 앞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전보다 몇 배나 더 뜨겁게 ‘꿈’을 향해 타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꿈의 팔을 달고
1996년, 경기도 안산의 방위 산업체에서 복무하던 무에타이 국가대표 선수 김선기는 프레스 기계를 고치다가 일순 머릿속이 하얗게 뒤집어지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오작동을 일으킨 기계가 괴물같은 입을 벌려 자신의 오른팔을 팔꿈치 바로 위까지 먹어치우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고로 그는 팔꿈치 절단 수술을 받아야 했고 6개월간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했습니다.
한쪽 팔을 앗아간 잔인한 운명에 맞서 김선기가 취했던 행동은 ‘꿈’의 팔을 달고 운명과 한판 승부를 벌이는 일이었습니다.
퇴원 후, 극도로 약해진 몸을 추스르자마자 그는 남은 한쪽 팔에 글러브를 끼고 무에타이 경기장으로 달려 갔습니다.
그는 대회 관계자들을 설득하여 다시 링에 올랐고, 세계 각국의 무에타이 선수들을 상대로 전보다 두 배는 더 맹열한 경기를 치르기 시작했습니다.
‘킥복서’의 꿈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 저주스러운 운명 앞에 김선기가 돌려준 것은 ‘꿈’을 향한 완전한 열정이었습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네 꿈을 지켜라
절망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현실 앞에서 ‘꿈’을 향해 빛처럼 쏘아져 나간 이 사람들의 ‘꿈’은 전부 이루어 졌습니다.
이순신장군은 세계 해전사상 유례없는 대승을 거두었고, 처칠은 독일에 승리했으며,
김은중은 국가대표선수로 활약하다 J리그에 진출했고,
김선기는 17전 14KO승을 거두며 한국 밴턴급 챔피언과 코리아 그랑프리 대회(세계 이종 격투기 대회)준우승에 올랐습니다.
이 사람들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꿈’은 완벽하게 ‘꿈’만을 바라보며 갖는 것이라고.
현실 대신 꿈을 선택하는 것이 온몸이 오그라질 정도의 고통과 두려움을 동반하는 것일지라도, 그 선택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믿음으로 갖는 것이라고.
‘꿈’으로 가는 산길을 오르다 운명이 던진 돌덩이에 얻어맞고,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해도, 천진하게 웃는 얼굴로 다시 일어나 다시 그 길을 간다는 자세를 갖는 것이라고.
‘꿈’을 추구함으로 인해 사람들과 멀어지고 마침내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된다 할지라도 여전히 ‘꿈’을 붙들겠다는 의지를 갖는 것이라고.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오늘 나는 ‘꿈’을 이루기 위한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각오를 갖는 것이라고.
한국의 성공자들은 다들 이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자신의 꿈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당신이 이 사람들보다 더 불리합니까?
휠체어 소년과 한쪽 팔이 없는 남자.
몇 년째 휠체어에서 생활하는 소년이 있습니다.
아주 어렸을 적에 소아마비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소년은 절대로 가져서는 안 될 꿈을 갖고 말았습니다.
우연히 체육관에 들렀다가 높이뛰기 연습을 하는 선수들을 보고 “멋지다.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소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 안타까운 친구야! 먼저 자네 병이나 나은 다음에 그런 생각을 해야지. 운동선수는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도 되기 힘든데...”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큰소리로 “난 믿어요.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요. 그러니 지켜봐 주세요.” 라고 대답하곤 하던 이 소년은 드디어 오늘 아침 체육관 문을 두드렸습니다.
한쪽 팔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막무가내입니다.
축구선수, 그것도 세계적인 선구가 되겠다며 그라운드에서 셔츠를 땀에 적셔 가며 매일 공을 차고 있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들마다 기가 막히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이렇게 충고합니다.
“이봐요, 외팔이 아저씨, 정신 좀 차려요! 당신은 절대로 축구선수가 될 수 없어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이 사람은 어깨를 한번 으쓱한 뒤, 이렇게 대답하고는 다시 공을 쫓아 그라운드를 질주합니다.
“저런! 당신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있군요! 잘 생각해 보세요. 난 팔 하나가 없어요. 그러니 난 그만큼 가볍고 그만큼 빨리 달릴 수 있죠. 내 몸은 엄청난 축구 경쟁력을 갖고 있는 거라구요. 세계적인 선수가 되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일 뿐이랍니다.”
소아마비 장애인과 근육마비 청년
소아마비 장애인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오른쪽 다리는 왼쪽 다리보다 6cm나 짧습니다.
게다가 바깥쪽으로 휘어져 있습니다. 왼쪽 다리도 정상이 아닙니다.
안으로 묘하게 굽어져 있습니다. 한마디로 보호장비없이는 걷기도 힘든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의학적으로나 상식적으로 확률 0.1%도 안 되는 꿈을 세웠습니다.
월드컵 축구 국가대표가 되겠다는 꿈을 세운 것입니다.
오늘도 불편한 몸을 이끌고 축구장으로 향한 이 사람은 연습을 하기에 앞서 자신의 신념을 마음속으로 조용히 되뇌었습니다.
“0.1%를 쌓고 또 쌓으면 언젠가는 100%, 200%가 된다. 자, 그러니 부정적인 생각일랑 버리고 연습 또 연습을 하자.”
얼굴근육이 마비된 채로 태어나 말을 제대로 못하는 청년이 있습니다.
게다가 한쪽 귀마저 멀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의 꿈이 말로 벌어먹고 산다는 정치가가 되는 것입니다.
지역주민들의 동정표를 기대할 수 있는 지역 의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나라의 총리가 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선거유세는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사람들의 편견은 어떻게 극복하지요? 반대파 사람들의 인신공격이 만만치 않을 텐데 대비책은 있습니까?” 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대답 대신 활짝 웃는 얼굴로 응답한 이 청년은 오늘 총리로 향하는 첫 관문인 국회의원에 입후보했습니다.
반 식물인간 대학생과 귀머거리 소녀
왼쪽 손가락 두 개와 얼굴 근육 일부분밖에 움직일 수 없는 대학생이 있습니다.
몇 달 전 루 게릭병이라는 희귀병에 걸려 반 식물인간이 된 이 대학생은 남은 평생을 휠체어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잘못하면 1, 2년 사이에 죽을 수도 있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갑자기 닥쳐온 지옥 같은 불행 앞에서 그러나 이 대학생은 웃으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내 몸은 매일 빠르게 죽어가고 있지만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박사학위를 따고 대학교수가 되겠다는 꿈이 있기에 나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라고 말하며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공부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타악기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한 소녀가 있습니다.
당연히 이 소녀의 꿈은 타악기 연주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녀는 죽었다 깨어나도 타악기 연주자가 될 수 없는 환경에 처해 있습니다.
귀머거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음악분야가 그렇지만 특히 타악기 연주는 극도로 섬세한 청력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 가지 종류의 북과 각종 건반 악기, 거기다 특수 타악기까지 무려 오십여 종이 넘는 악기들을 다룰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너무나도 명백해 보이는 불가능 앞에서 그러나 이 소녀는 두 눈을 반짝이며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어. 내 모든 것을 걸고 꿈을 향해 나가자. 그러면 언젠가는 문이 활짝 열릴 거야. 반드시 그럴 거야.”
이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루어 질 수 없는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이 사람들의 ‘꿈’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놀랍게도 이 사람들의 ‘꿈’은 전부 이루어졌습니다.
금메달리스트와 월드컵 우승선수
1900년 파리 올림픽에서는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높이뛰기 경기장에 휠체어를 탄 선수가 입장하더니 곧바로 경기에 출전, 금메달을 목에 걸었기 때문입니다.
더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습니다.
레이 유리라는 이름의 이 선수가 높이뛰기, 세단뛰기에도 출전하더니 이 두 종목에서도 금메달을 땄기 때문입니다.
휠체어 위에 앉아서 꾸었던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레이 유리는 이후 3회의 올림픽에 더 출전했고 거기서 총 7개의 금메달을 땄습니다.
현재 그는 올림픽 역사상 가장 많은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1930년 제 1회 FIFA 월드컵 대회 결승전, 매우 불안정한 포즈로 마치 광대춤을 추듯 좌우로 기우뚱거리며 그라운드를 내달리던 한 선수의 발에 공이 걸렸습니다.
공은 이내 역전 결승골로 연결되었고, 이 골로 말미암아 우루과이는 제 1회 월드컵 우승국가가 되었습니다.
역전골을 성공시킨 영광의 주인공은 카스트로, 어릴 때부터 오른팔이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국가대표 축구선수와 총리
1962년 칠레 월드컵 브라질 대 칠레의 준결승전, 축구 황제 펠레가 부상을 당해 벤치에 앉아 있는 가운데 한 선수가 잔디 구장을 나는 듯이 달려서 연속적으로 두 골을 성공시키자 경기장은 관중들의 전율섞인 함성으로 달아올랐습니다.
브라질에 우승을 안겨 준 두 골의 주인공은 소아마비에 걸린, 달리는 모습마저 위태해 보이는 가린샤라는 선수였기 때문입니다.
보호 장비 없이는 걷기도 어렵다는 판정을 받았던 가린샤는 열일곱 살에 국가 대표 축구 선수가 되었고, 총 3회의 월드컵 대회에 참가하여 우승했으며 선수생활 11년 동안 54경기에 출전하여 34골을 득점했습니다.
1963년 캐나다 퀘백 주, 한 젊은이가 눈에 뜨거운 물줄기를 가득 담은 채 지지자들의 손을 일일이 맞잡으며 당선사례를 하고 있었습니다.
스물아홉 살인 이 청년의 이름은 장 크레티앙, 언어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꿈은 정치가가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국회의원에 입후보했던 바로 그 청년이었습니다.
“정치경력도 없고 거기다 언어장애까지 있는 사람이 국회에 나가서 대체 뭘 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반대파의 집요한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러분, 나는 말을 잘 못합니다. 그러나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라고 맞서며, 선거유세를 훌륭하게 치러 냈던 장 크레티앙은 그 뒤로도 16년간이나 정부요직을 두루 거치며 유능한 정치가로 활동했고, 부총리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1993년, 드디어 총리에 당선된 장 크레티앙은 그 이후로 세 번이나 총리에 당선되었습니다.
캠브리지 대학교 교수와 타악기 연주자
1997년 캠브리지 대학교, 강의를 마친 한 교수가 학생들의 경외심어린 기립박수를 받으며 교수실로 향했습니다.
교수의 이름은 스티븐 호킹, 14년 전 루 게릭병에 걸려 반 식물인간이 되고서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던 바로 그 대학생이었습니다.
스티븐 호킹은 휠체어에 앉게 된 뒤 박사 학위를 땄고, 영국 학술원 최연소 회원이 되었으며 캠브리지 대학 중력 물리학 정교수가 되었습니다.
1990년대 후반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연주회장, 각종 타악기들이 빼곡히 들어찬 중앙무대를 중심으로 뉴욕 필하모니 연주단이 U자형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윽고 맨발의 타악기 연주자와 뉴욕 필하모니의 협연이 이루어졌습니다.
뉴욕 필하모니는 천상의 선율을 뿜어내기 시작했고 이에 맞춰 타악기 연주자가 무려 50여 종에 이르는 타악기를 두드려 대기 시작했습니다.
타악기 연주자는 오케스트라 연주에 맞춰 북과 징을 쳤고 마람바와 비브라폰을 두드렸으며 심벌즈와 케스트네츠를 쳤습니다.
한 곡 한 곡 연주가 끝날 때마다 관객들은 뜨거운 기립박수로 화답했고, 뉴욕 필하모니와 타악기 연주자는 더욱 신명나게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이날 공연을 성공리에 마친 타악기 연주자의 이름은 애블린 글레니.
20여 년 전, 소리를 들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믿으며, 매일같이 타악기 연주실로 향했던 바로 그 귀머거리 소녀였습니다.
“귀로 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에 몸으로 소리를 듣는 법을 터득했다.”고 말하는 애블린 글래니는 삼십대 중반에 세계적인 타악기 연주자의 반열에 올랐고, 10장 이상의 음반을 냈으며, 매년 120회 이상의 타악기 연주회를 갖고 있습니다.
포기하지만 않으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주변에서 ‘꿈’의 성취를 믿는 사람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더 많이 보게 됩니다.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라고 말하는 사람보다 “꿈은 꿈일 뿐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을 더 많이 접하게 됩니다.
“나는 할 수 있어. 너도 할 수 있어. 우리는 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보다 ”나는 안 돼. 너라고 될 줄 알아? 우리는 전부 다 아니야“라고 말하는 사람을 더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꿈’을 갖기를 두려워하고, 꿈이 생겨도 적극적으로 추구할 용기를 갖지 못하고, ‘꿈’을 가졌다가도 이내 포기하고 맙니다.
그러나 과연 부정적인 사람들의 의견이 옳은 것일까요?
‘꿈’의 성취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안 돼”라고 씌여진 검은 안경을 쓰고 ‘꿈’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요?
간절하게 ‘꿈’을 가져 본 적도, 끝까지 ‘꿈’을 믿어 본 적도,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꿈’을 추구해 본 적도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요?
‘꿈’을 이룬 사람들은 그들과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습니다만...
강영우
연세대학교 문과대학을 차석으로 졸업하고 미국 피츠버그 대학교에서 교육학 석사, 심리학 석사, 교육전공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현재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 교수, 인디애나 주정부 특수 교육 부장, 루즈벨트 재단 고문, 백악관 정책 차관보, 유엔 장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는 시각장애인의 몸으로 이 모든 일을 해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나는 열세 살에 시력을 잃고 열여덟 살에 중학교 1학년부터 다시 시작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여러분,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오르지 못할 산은 없습니다.”
김태연
1985년, 40세의 나이로 세 아들을 데리고 버몬트로 떠나 캘리포니아로 향했습니다.
실리콘밸리를 주름잡고 미국최대의 태권도장을 세우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겨우 85명의 수련생으로 시작한 태권도장 ‘정수원 아카데미’는 현재 미국 서부 최대의 태권도 도장으로 성장했고, 집을 팔아 마련한 사업자금 6만 불을 날리는 대실패로 시작한 컴퓨터 회사 ‘라이트 하우스’는 현재 미국에서 단일 회사로는 최고의 매출을 올리는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잇따른 사업실패로 끼니도 잇기 어려워 들에서 쑥을 뜯어다 먹고, 정육점에서 버리는 소뼈를 먹어야 했던 시절, 아들들마저 자신의 ‘꿈’에 회의 섞인 반응을 보이는, 더할 수 없이 아프고 힘든 순간이면, 김태연은 목욕탕으로 들어가 물을 최대로 크게 틀어 놓고 통곡하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가 가진 꿈이 1%고 주위환경이 99%라고 해도 난 포기하지 않아. 언젠가는 이 1%의 꿈이 99%의 환경으로 변하게 될테니까. 내가 그렇게 만들고 말 테니까. 그도 할 수 있고 그녀도 할 수 있는데 나라고 왜 못해!’
윤생진
스물여덟 살의 나이로 전남 곡성에 위치한 금호타이어 공장에 윤생진은 취직했습니다.
거기서 하루종일 등을 구부리고 앉아 타이어 고무를 붙이고 잘라내는 일을 했습니다.
1999년 12월 31일, 윤생진은 금호그룹 부장에서 상무이사로 승진했습니다.
대한민국 30대 그룹 중, 고졸 생산직 근로자에서 출발해 부장이상으로 승진한 사람은 윤생진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는 현재 조선대학교 교수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1978년 입사 면접시험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꿈’은 금호타이어 부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보시오, 고졸 출신은 기껏해야 ‘반장’밖에 못 올라가. 부장은 서울대 출신도 되기 힘들다고.”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18년 동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매일 부장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제 ‘꿈’은 부장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반드시 되고 말 것입니다.”
박숙경
중학교를 중퇴하고 미용실에서 하루 종일 손님들의 머리를 감아주고, 미용실 바닥을 청소하는 미용 보조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현재 그녀는 영국런던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세시 헤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영국 킹스턴 대학의 교수로 일하고 있으며 세계 최초의 사이버 미용 대학인 I.B.C의 학장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밥’을 먹고 살지 않았습니다. 나는 ‘꿈’을 먹고 살았습니다.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도전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꿈’은 이루어집니다.”
오대규
서강대학교에 수석 입학했고 수석 졸업했습니다.
대학생 시절 ‘주식 전도사’로 이름을 날리며 10억 원 규모의 사설 펀드를 운영했습니다.
AIG생명에 입사해 6개월 만에 최연소 팀장이 되었고 연속 영업실적 1위를 기록했습니다.
스물아홉 살에 유망 벤처기업 ‘노리넷’의 최고 경영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절고 한쪽 팔을 쓰지 못합니다.
더구나 뇌 한쪽이 죽어 있는 뇌성마비 장애인이기도 합니다.
그는 5수 끝에 대학생이 되었고, 50군데의 회사에서 퇴짜를 맞은 후 취직했으며, 40군데가 넘는 투자사로부터 거절을 받은 뒤에 노리넷을 설립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계란으로 계속 치면.... 바위는 깨집니다.”
짐 애보트
열한 살 때부터 프로야구선수를 꿈꾸었습니다. 99년 밀워키를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그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세웠습니다.
88년 서울 올림픽 시범 경기 결승전에서 일본을 5 - 3으로 제압하고 금메달을 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 공로로 그는 미국 최고의 아마추어 운동선수에게 주어지는 셜리번 상을 수상했습니다.
메이저리그 사상 열여섯 번째로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메이저리그로 직행했습니다.
1993년 양키스타디움에서 벌어진 클리브랜드 인디언스전에서 투수 최고의 영예인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 10년 동안 평균 시속 150Km의 강속구를 던지는 A급 투수로 활약하면서 통산 87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이 모든 일을 왼팔 하나로 해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오른팔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야구장을 향할 때마다 나는 내 팔을 보지 않았습니다. 나는 내 ‘꿈’을 보았습니다.”
우리 시대에,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어낸 사람들의 수를 바다에 비유한다면 위의 예를 든 사람들은 그 바다를 구성하는 물방울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꿈’을 이룬 사람들이 세상에 전하는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어떤 조건하에서도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꿈을 갖고 그것을 계속 추구할 용기를 갖는다면 누구라도 자신들과 똑같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가슴속에 자신이 되고 싶은 이상의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이상의 모습은 자신이 처한 현실과는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큰 차이가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보통 그것을 꼭꼭 눌러두고 삽니다.
그러나 아무리 누르고 또 눌러도 그것은 절대로 눌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 마음 속 가장 높은 곳으로 튀어 오릅니다.
그와 같은 꿈의 영상이 우리 안에 마치 목숨처럼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의 무의식이 다음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사람에게는 자신이 꾸는 꿈을 이룰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존재하는 꿈의 세계를 인정하고 그것을 삶의 목표로 정하고 온 마음과 온 영혼을 다해 그 꿈을 추구하십시오.
꿈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한 양조업자의 꿈
1947년경에 한국에서 양조업을 한다는 것은 가만히 앉아서 돈벼락을 맞는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모두들 양조장을 갖지 못해 안달하던 그 때, 대구 최대의 양조장을 운영하던 한 양조업자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 모든 것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정치도, 경제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나 혼자만 호의호식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이제부터 나는 자주 독립 국가의 경제 건설에 응분의 소임을 다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대구의 갑부로 행세할 수 있는 기회를 버리고 ‘꿈’을 찾아 서울로 올라간 그가 세운 회사는 ‘삼성’이었습니다.
한 젊은 사장의 꿈
1950년대 후반, 일본의 한 회사 사장은 아주 많은 돈을 들여 회사 이름을 고쳤습니다.
‘도쿄추신코교’라는 회사명을 외국 사람들도 발음하기 쉬운 영어식 이름으로 고친 것입니다.
세계로 뻗어나가는 기업이 되려면 이름도 세계적이어야 한다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사장의 결정은 이내 맹렬한 반대에 부딪쳤습니다.
“우리 회사는 설립한 지 10년만인 지금에야 겨우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도쿄추신코교’라는 이름을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많이 선전해야 마땅할 이 때에 회사 이름을 바꾸고 새로 시작하겠다니, 이 무슨 엉뚱한 소리입니까?”
“국내 시장 개척만도 할 일이 태산 같은데 대체 어느 세월에 외국과 거래를 트겠다는 거요? 세계를 향한 꿈도 좋지만 먼저 일본에서 성공하는 것이 급선무이지 않겠소? 당신 회사는 이제 막 뜨기 시작했소. 지금은 무슨 일이 있어도 ‘도쿄추신코교’라는 이름을 유지해야 하오”
그러나 사장의 답변은 한결같았습니다.
“나는 우리 회사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우겠다는 꿈을 세웠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세계 시장에 걸맞는 새로운 이름이 있어야 합니다. 옛날 이름을 가지고는 세계시장을 공략할 수가 없습니다.”
‘도쿄추신코교’사장이 새로 선택한 이름은 ‘소니sony'였습니다.
이젠 당신이 미쳐야 할 때
삼성의 창립자 이병철은 한창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을 때, 그 모든 것을 팽개치고 장래가 불확실한 무역업이라는 ‘꿈’을 향해 뛰어 들었습니다.
소니의 설립자 모리타 아키오는 이제 막 장밋빛 인생이 펼쳐지려는 찰라, 그 꽃길을 버리고 ‘꿈’으로 이어지는 가시밭길로 들어섰습니다.
현실에 안주하는 대신 꿈을 따라나선 두 사람에게 세상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꿈을 갖지 않은 다른 양조업자들과 다른 회사들이 한창 좋은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 이병철은 사업체가 세 번이나 날아가는 아픔을 겪어야 했고, 모리타 아키오는 ‘워크맨’으로 성공하기까지 20여 년 동안 자금난으로 인한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꿈’을 비웃고, 무시하고, 반대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오늘날 삼성과 소니는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양조장은 사라졌고, ‘도쿄추신코교사’의 결정을 비웃었던 당시 일본 회사들 역시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꿈’을 가졌느냐, 갖지 않았느냐의 차이가 오늘날의 결과를 만든 것입니다.
한국에서 크게 성공한 사람들 역시 다들 꿈에 미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지방에서 두 다리 뻗고 편히 장사할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하고, 고추장 단지 하나 들고, 대기업이 판치는 서울로 돌진해 들어가는 사람들이고, 매일 한정적으로 3만 마리의 닭을 팔 수 있는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하루 20만 마리의 닭을 팔겠다며, 파산의 위험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업을 확충해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미친(狂) 사람만이 미친다(及)는 말을 이들은 증명해 보였습니다.
대전 삼원식품 오정근 사장은 서울로 진출하면서 새로 이름을 바꾼 회사 ‘해찬들’을 10년 만에 고추장, 된장, 쌈장 시장점유율 전국 1위로 끌어 올렸고, (주)하림의 김흥국사장은 닭고기 시장을 제패하면서 (주)하림을 계육 시장 부동의 1위 기업으로 만들었습니다.
지금까지 며칠에 걸쳐 열거한 수많은 성공자들의 사례들을 잘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의 사례들 중 과연 당신보다 얼마나 나은 환경이라서 그들은 그들의 꿈꾼 바를 이루었습니까?
당신은 이들보다 수십 배, 수백 배 나은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 이제는 당신 차례입니다.
이젠 당신이 꿈에 미쳐 비현실적인 행동을 개시해야 할 때입니다.
미쳐서(狂) 미치십시오(及).
미치면(狂) 당신도 한국의 성공자가 될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 ‘나는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확신에 미치면 당신은 틀림없이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부자가 되고 성공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굳게 믿고 자신이 이룰 꿈을 커다랗게 정하십시요.
그러면 저는 틀림없이 당신의 꿈을 이룰 방법을 차근차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오로지 다짐만 하십시오. “나는 틀림없이 부자가 되겠다”라고...
그 믿음을 굳게굳게 마음속에 새겨 두시고 잠시도 그 마음을 놓치지만 마세요.
지금까지 예를 든 수많은 성공자들의 사례들은 시간나는 대로, 그리고 당신이 행여 자신의 꿈을 이루는 과정이 어렵고 힘들다고 느껴질 때 두고두고 읽어 보십시오.
결코 이루지 못할 꿈은 없습니다.
당신이 지레 포기하고 스스로 확신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이루지 못할 뿐입니다.
지금 당신의 처지가 어떻든 그건 결코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앞으로 보내드리는 글은 당신이 꿈꾼 부자의 길을 확실하게 보여드릴 것입니다.
지금까지 부자들의 습관 중 가장 첫 번째 습관, 즉 꿈에 대해서 사례를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내일부터는 당신의 꿈과 목표를 세우고, 그 꿈과 목표를 이룰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을 하나하나 자세히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원글: 희망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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