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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 말 사회적 모순과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신흥사대부와 신흥무인세력이 조선왕조를 세웠다. 이성계는 왜적과 홍건적을 물리치면서 신흥 세력들의 중심인물로 등장하였고 이색, 정도전 등의 신흥사대부와 함께 커다란 정치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요동정벌을 위해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였지만 위화도에서 말 머리를 돌려 개성으로 되돌아가 개성을 함락하였다.위화도회군 이후에 신흥세력들은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대신하여 창왕을 왕위에 앉히고 정권과 군사권을 잡으면서 새 왕조의 기틀을 세우는데 힘쓰고 있었다. 이후에 급진적 토지개혁인 과전법을 만들어 고려의 |
기득권 세력이었던 권문세족들의 경제기반을 무너뜨리고 그 과정에서 온건한 개혁을 추구하던 정몽주 등을 제거하였다. 1392년 7월 17일 개성 수창궁에서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을 대신해 왕위를 물려받은 태조 이성계는 즉위식 이후 교서(敎書)를 내려 ‘국호는 종전대로 고려라고 하며 의장(儀章)과 법제(法制)도 모두 고려의 제도를 계승한다’라고 선언하여 겉으로는 새로운 왕조를 세울 뜻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새 왕조를 세울 준비가 되어가자 새 왕조의 이름을 ‘조선(朝鮮)’이라고 정하고 태조2년(1393) 2월부터 ‘조선’이라는 이름을 정식으로 사용하였다.
왕위를 이어 받은 지 1달 만에(1392.8)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기로 정하고 궁실(宮室)을 지어 바로 옮기려고 하였지만 궁실과 성곽이 완성된 뒤에 옮기자는 의견이 있어 미루고 있었다.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려고 하는 이유는 고려의 옛 세력이 머무르는 개성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과 풍수설에서 ‘왕씨를 대신할 사람은 이씨이니, 이씨가 한양에 도읍하게 될 것이다’, ‘송도[개성]는 땅의 기운이 다하였다’ 라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었던 것, 새로운 국가를 세운 왕조는 새로운 수도를 정한다는 것, 사회적인 혼란을 정리하고 흩어진 백성들의 마음을 수습하기 위한 것 등을 그 이유로 들 수 있다.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는
이야기가 미루어지다가 태조 2년(1393)부터 수도를 옮기는 논의가 다시 일어나면서 계룡산이 새 수도 후보지로 물망에 오르게 되었다. 이성계는 직접 계룡산으로 찾아가 현장을 돌아보고 나서 결정하여 10개월 동안 도시 건설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경기도 관찰사인 하륜이 ‘계룡산은 남쪽에 치우쳐 있기에 교통이 불편하고 풍수적으로도 패망할 곳’이라고 주장하자 그 의견이 받아들여져 계룡산에 세우려던 수도 건설은 포기하고 말았다. 계룡산 다음으로 새 왕조의 수도로서 물망에 오른 곳은 하륜이 주장한 무악(毋岳), 서운관(書雲觀)들이 주장한 불일사, 선점 등이 있었다. 무악은 그 터가 좁아서 어울리지 않다고 의견이 모아지고 불일사와 선점은 사대부들에게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었다. 이성계는 무악을 직접 확인하고 돌아오는 길에 고려 남경(한양)을 둘러보면서 신하들의 의견을 물었더니, ‘한반도 안에서 가장 훌륭한 도읍지는 송경(松京; 개성)이고 그 다음으로 한양인데, 다만 지형적으로 보아 서북쪽이 낮고 수원(水原)이 마른 약점이 있다-윤신달’, ‘한양은 4면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이 평탄하여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한 곳이라고 생각되나, 천도는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따라 결정해야 한다-무학대사’라고 하여 긍정적인 답변을 듣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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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태조는 최고 고위관료들의 모임인 도평의사사에게 수도 옮기는 것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도록 지시하였고 태조 3년(1394) 8월 24일 도평의사사에서 ‘… 그윽이 한양을 보건대, 안팎 산수의 형세가 훌륭한것은 옛날부터 이름난 것이요, 사방으로 통하는 도로의 거리가 고르며 배와 수레도 통할 수 있으니, 여기에 영구히 도읍을 정하는 것이 하늘과 백성의 뜻에 맞을까 합니다' 라고 하여 강산의 뛰어난 형세와 전 국토의 중심지에 위치하여 교통이 편리한 장점을 들어 한양이 수도로서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하였다. 유교의 합리적인 지리관을 바탕으로 의견이 모아지자, 9월에 궁궐을 짓기 위한 임시기구[신도궁궐조성도감 新都宮闕造成都監]를 설치하고 권중화,정도전 등이 한양으로 내려가 종묘, 사직, 궁궐 등의 터를 정하였다. 궁궐(경복궁) 터는 고려 옛 궁궐의 남쪽에 자리를 잡았다. 정도전 등이 기본조사를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심덕부와 김주가 한양에 남아 새 수도 건설을 진행하고 있었고 한 달 뒤인 10월25일 태조 이성계는 개성을 떠나 28일에 한양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아직 궁궐 공사가 시작하지도 않았기에 이궁(離宮)으로서 한양부 객사에 머물렀다. 종묘와 궁궐 공사는 12월에 황천후토와 산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시작하였다. 다음해인 태조 4년(1395) 9월에 종묘와 궁궐이 완공되었고 왕은 12월에 궁궐로 옮길 수 있었다. 태조 4년(1395) 6월에는 행정기관 이름을 한양부에서 ‘한성부’로 바꾸었다.
종묘,사직과 궁궐을 지어 수도로서의 기본을 갖추고 나자 다음으로는 수도를 방어하기 위한 성곽 쌓기를 진행하였다. 태조는 직접 도성 터를 둘러보고 도성 쌓기는 일을 담당하는 임시기구 도성조축도감(都城造築都監)을 설치하였다. 본격적인 도성 쌓기는 다음해인 태조 5년(1396) 1월부터 시작하였다. 백악신과 오방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경상,전라,강원도 등의 백성들 118,070명을 동원한 대규모 공사였다(당시 서울 인구 약 50,000여명 추정). 당시 성의 길이는 총 59,500척으로 600척을 1구간씩 전부 97구간으로 나누어 공사를 하였다. 백악 동쪽의 제1구간을 ‘천(天)’으로 시작하여 각 구간마다 천자문 순서에 따라 순번을 정하였다. 그리고 성벽에 공사 책임자의 이름, 지역 등을 새기기도 하였다.
태조 5년(1396) 2월에 1차적으로 공사를 마쳤지만, 폭우 등으로 소실되거나 공사 중에 미흡했던 부분들을 보수해야 했기 때문에 성곽 쌓기 작업은 태조 7년 2월까지 계속되었다. 성곽 쌓는 공사 기간 중에 한양을 출입하는 도성문이 완성되었다. 이후 대대적인 도성 쌓기 공사는 세종, 숙종대에 있었는데, 세종 때에는 상왕인 태종의 명으로 허물어진 곳을 보수하는 공사가 있었고 이 때 흙으로 쌓은 부분이 대부분 돌로 다시 지어졌다. 숙종 때에는 국방의식이 높아지면서 숙종 30년(1704)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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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동안 3군영(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이 분담하여 대대적인 도성 쌓기 공사를 진행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도시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왕조를 상징하는 건물과 도성들이 훼손되었으며 1975년부터 1981년까지 종합적인 도성복원사업이 시작되었다. 이 때, 도성을 세부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총 길이가 18,127m이고 완전히 사라진 부분이 6,703m, 파손된 부분이 11,424m이었다. 이 기간 중에, 복원 가능한 부분 중에서 9,794m를 복원하였다. 이후에도 꾸준히 복원공사가 이루어고 있으며 복원 불가능한 부분을 제외하고 2천여 미터가 더 복원될 예정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