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호 에움길 따라서: 호숫가에서 만나는 며느리산마을
충주호를 휘감은 에움길은 30km가 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비포장길이다. 먼지 날리고 자갈이
튀고 덜컹거리는 길이지만 이 길을 따라 사는 마을 사람들은 한없이 넉넉하고 소박하다.
오른쪽은 산, 왼쪽은 호수, 그 사이로 이어진 길. 길 중간 중간에 자리한 호숫가 마을들. 더러 별장같은 집들이 눈에
거슬리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 집들이 다른 모든 것을 거슬리게 하는 것은 아니다. 제천시 금성면에서 충주시 동량면 솟대거리까지 호수를 따라
펼쳐진 에움길. 길이라면 무조건 포장하고야 마는 우리나라에서 이토록 긴 비포장길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이 길이 좋다. 먼지
날리고, 자갈이 튀고, 덜컹거려도 나는 그 불규칙한 덜컹거림의 리듬이 좋다. 길은 호수를 따라 구불구불 물굽이가 펼쳐진 대로 이어져
있다. 그리고 중간 중간 수몰마을에서 윗자락으로 옮겨온 마을들이 묻혀버린 옛날을 그리워하듯 호수를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20여 년 전
충주댐이라는 거대한 다목적 댐은 단양에서 충주로 이어지는 강줄기에 젖줄을 대고 살던 많은 사람들을 하루아침에 실향민으로 만들어 버렸다.
농사밖에 몰랐던 순박한 충청도의 강마을 사람들은 너무나 순진하게 고향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대도시에 나가 변변한 집 한 채 값도 안 되는
보상금을 잃어 버릴까봐 안주머니에 고이 접어 넣고 서울로, 충주로, 제천으로, 단양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는 요즘의
수몰민들처럼 거리로 나가 데모할 줄도 몰랐고, 부당하다고 말 한마디 할 줄 몰랐던 사람들. 그들이 떠난 삶터는 곧바로 수장되어 오늘날의 거대한
충주호가 되었다. 호수를 휘감은 채 금성에서 동량까지 이어진 이 곳의 에움길은 수몰민인 내게는 너무나 짠한 길이다. 이 에움길은 무려
30㎞가 훨씬 넘게 먼지가 푸석거리는 비포장길로 충주시 동량면 지동리 솟대거리까지 이어진다. 황석리, 후산리, 사오리, 부산리, 오산리, 만지,
지동리. 그러나 사오리에서부터 뽕나무거리까지의 일부 구간은 포장공사를 하기 위해 길을 닦아 놓은 상태여서 비포장길의 운치는 잠시 끊기고 만다.
이 곳의 길을 따라가며 만나는 마을은 언제부턴가 낚시터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호수에 떠 있는 수상가옥들. 물 위에 떠 있는 판잣집.
오지마을에서 이제는 낚시마을이 다 되었다.
내내 호수를 눈에 담고 달리는 길. 길가에는 왕고들빼기, 노란 마타리와 산국, 구절초, 벌개미취가 한창이다. 이따금 만나는 담배 건조실은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하나같이 무너져 있다. 담배 농사를 짓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늘에 뜬 구름 몇 점이 호수에도 떠서 느릿느릿 제 몸을
밀고 간다. 그렇게 나도 내 몸을 밀고 간다. 산 뒤에 있다는 후산(後山)리 지나는 길에서는 길을 막고 풀을 뜯는 수십 마리의 흑염소 떼를
만났는데, 한동안 길을 비켜주지 않아 아예 차 엔진을 끄고 10여 분을 기다렸다. 공연히 여행을 핑계로 녀석들의 평화로움을 깨고 싶지
않았다. 후산리와 사오리를 지나면 곧바로 부산리다. 30㎞가 넘는 호숫가 에움길에서 만나는 여러 마을의 중간쯤에 자리한 마을이다.
황석리에서 가든, 지동리에서 가든 10㎞ 이상 비포장길을 달려야 닿을 수 있는 마을이다. 부산리에서 만난 92세의 고창운 노인은 귀가 어두웠다.
얼굴 가까이 입을 들이밀고 이야기해야 대화가 통했는데, 그 나이에도 혼자 밥해 먹고 토종벌도 치고 옥수수 같은 것들도 심는단다.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시죠?” “적적해두 할 수 없주. 내 손으로 밥 낄여먹구, 사는 게 다 그렇주 뭐.” “그래도 경치가 참 좋네요.” “내가 아흔
둘이유. 힘이 없으니 이래 지끔은 지팽이 짚구 댕겨유.” 사는 게 다 그렇다는 말을 아마 나는 90세까지는 이해하기 힘들 것 같다.
부산리는 며느리산(婦山) 밑에 있다고 붙여진 이름인데, 풀어서 말하면 며느리마을이 되는 셈이다. 그 때문인지 부산리에서는 산제당에도
여신을 모신다. 다른 마을과 또 다른 점이 있다면, 당산제도 한여름인 7월 초하루에 지낸다는 것이다. “날을 잡고 제주를 뽑으면 그
사람은 파리 한 마리두 안 잡어유. 꼭 목욕해야 되구. 운이 젤 좋은 사람이 제주가 되는데, 여기 신령은 여신령이래잖어유. 저 뒤에 산이
메느리산이래서 우리는 여신령을 모셔유.” 금줄을 두른 느티나무(당산나무) 아래에서 만난 지수영(65) 씨는 바로 앞 고추밭에서 고추를 따다 나와
묻지도 않은 당산제 이야기를 주섬주섬 털어 놓는다.
그가 담배를 한 대 피우는 동안 느티나무의 커다란 그늘은 그의 얼굴에 송송 솟은 땀을 시원하게 식혀 주고 있었다. 느티나무 아래쪽을 보니 길
옆에도 새끼줄을 드리워 금줄을 쳐놓았다. 이렇게 커다란 그늘을 드리우고 있으니 그 신령함도 넉넉하리라. 언제 보아도 당산나무로 섬기는 느티나무는
그 그늘이 큼지막하다. 느티나무는 그 그늘을 고스란히 이 곳을 찾는 사람들에게도 골고루 나눠준다. 제사를 지내주는 것에 느티나무는 그늘로 보답을
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놀이터요,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쉼터요, 마을 전체로 보면 신앙터가 되는 곳, 그 곳이 바로 당산나무인
셈이다. 열 가구 남짓 사는 외떨어진 호숫가 마을. 부산리 사람들은 다들 마음이 넉넉하다. 지수영 씨는 느티나무 그늘이 좋으니 좀 쉬었다
가라고 자꾸만 붙잡고, 고창운 노인은 해도 저물지 않았는데 잘 데는 있느냐고 물어본다. 내가 부러 없다고 하니, 그럼 잘 가라고 한다. 귀가
어두워도 내 맘을 잘 알아주니 그게 나는 좋다. 부산리를 벗어나 지동리 쪽으로 난 길을 버리고 호수 쪽으로 내려가자 만지에서 길은 호수로
빠져들어 꽁무니가 보이지 않았다. 만지, 가득찬 연못이란 뜻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선조들은 이 곳이 물에 묻힐 것을 알고 만지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으니, 그 신통함에 고개가 숙여진다. 물 속에도 길이 있다면, 길이여 내가 살던 곳이 여기서 지척이니 그 곳에 가거든 안부나
전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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