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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녹음이 짙어지면서 봄은 여름으로 넘어가고 있다. 강을 따라 반짝거리는 햇살이며, 짙푸른 나뭇잎의 살랑거림이
마음을 설레게 하는 길을 따라 섬진강변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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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섬진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곳, 전북 임실 운암호에는 외로움만큼 고즈넉한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운암호는
지난 1965년 섬진강댐이 건설되면서 생겨난 것으로, 강 주변의 많은 주민들을 수몰민으로 만들어버린 호수다. 이 호수가 생기면서 여러
마을이 수몰마을이 되었지만, 어떤 마을은 아예 섬처럼 고립되어 배가 아니면 바깥출입을 전혀 할 수 없는 마을도 생겨났다. 이른바 육지 속의 섬,
뭍섬마을. 그 대표적인 마을이 바로 운암면 용운리 외안날과 운정리 수암마을이다. 용운리 가는 길에 호수를 따라 일주도로처럼 난 비포장
길에서 내려다보면, 드넓은 호수에 빙 둘러싸인 그림 같은 섬 하나가 보이는데, 이 섬이 바로 외안날이다. 외안날로 가려면 천상 운암면 입석리나
용운리에서 배를 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얼마 전 면에서 운암호 일대 마을의 크고 작은 배들을 호수 보호 차원에서 대부분 보상 수거해 간
뒤로, 호수에서 배를 만나기도 이제는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용운리에 도착해 마을 사람들에게 외안날에 들어갈 방법을 묻자,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최기장 씨(56)를 찾아가 보란다. 다행히 최기장 씨는 배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밭을 다녀와 피곤한데도 기꺼이 우리를 외안날까지
태워다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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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안날은 용운리에 속하는 섬마을로, 현재 단 한 가구, 주민 한 명만이 살고 있다. 단 한 명의 거주인은
박대서 노인(80). 그는 이 곳에서 농사와 고기잡이로 생활해가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외안날에는 모두 세 가구가 거주하고 있었지만,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까닭에 모두 다른 곳으로 이주해 버렸다. 외안날의 유일한 정착민인 박대서 노인은 약 20여 년 전쯤 이 섬에 들어왔다고
한다. “공기 좋고, 낚시해서 고기 잡고, 밥 먹고 살면 됐지. 더 바랄 게 뭐가 있소.” 남들이 보면 강태공 같은 말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하루하루 농사를 짓고 때때로 고기도 잡는 고달픈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힘든 것은 마치 유배와도 같은
외로운 섬 생활. 이 외롭고 고달픈 삶은 그가 스스로 택한 삶이었다. 애당초 이 섬에 들어올 때 그런 삶을 각오했던 바이다. 그는 가끔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배를 저어 섬 밖 나들이도 즐기고 마실도 간다. 그리고 다시 섬으로 들어와서는 텃밭에 나가 고추밭도 매고, 깨밭을 돌보기도 한다.
가을이면 섬에 지천으로 널린 밤나무를 찾아 밤을 주워다 놓는다. 섬 곳곳에는 산림조합에서 심어 놓고 간 밤나무가 수십 주에 이르는데, 그는 이
밤을 오는 사람, 가는 사람에게 나눠 주기도 한다. 본래 박 노인이 사는 외안날은 1965년 섬진강 다목적댐이 만들어 낸 산물로,
운암면과 신평면 일대가 수몰되면서 원래 용운리 불암동 뒤쪽에 있던 산의 일부가 남겨진 것이다. 외안날을 섬으로 만들어버린 운암호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빙어가 많기로 첫손에 꼽는 호수였다. 100여 리에 이르는 운암호에는 수역이 넓고 수심이 깊은 까닭에 빙어뿐 아니라 다양한 토종
어종이 풍부하게 분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년 전부터 외래 어종인 블루길과 베스가 급속히 늘어남에 따라 우리 토종 어종은 씨가 마르고 있는
실정. 뿐만 아니라 낚시꾼들이 사용하는 떡밥과 아무렇게나 버리고 간 쓰레기로 운암호는 자정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호수 전체에
걸쳐 녹조까지 심하게 발생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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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안날이 속한 용운리는 과거 용동과 내마촌, 불암동 3개 마을이 있었으나, 불암동은 댐으로 인해 완전 수몰되고
수몰이 되지 않은 산꼭대기를 외안날로 부르게 되었다. 섬진강댐이 들어서면서 용운리는 삼면이 물로 둘러싸인 곳이 되었으나, 다행히 운암호
순환도로가 뚫리면서 그나마 바깥출입은 좋아졌다. 용운리에서 운암호 아랫자락으로 더 내려가면 운정리가 나오는데, 이 곳에도 섬처럼 고립된 마을이
또 하나 있다. 수암마을이 바로 그 곳이다. 수암마을에 가려면 운정리 들머리인 장자골이나 끝자락 마을인 범호마을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수몰 전만 해도 운정리에는 약 50여 호 정도의 집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 중 범호마을 쪽에만 30호 정도가 살았으나, 지금은 8가구가 고작.
운정리는 섬진강댐 공사로 인해 유정, 내고, 외고 등의 동네가 완전히 물에 잠기면서 그 주민의 일부가 범호리와 수암, 장자골에 마을을 형성하면서
생긴 이름이다. 수몰 전만 해도 범호마을의 집들은 샛집(억새 지붕)이나 초가집이 대부분이었지만, 지금은 송현석 씨(66)네 헛간채만이 과거의
샛집을 유지해 오고 있다. 이 헛간채는 억새를 이은 지 30년이 넘었다고 하며, 지붕의 수명이 다 된 상태로 그냥저냥 내버려 두는
실정이다. 범호마을을 마주보며 호수 건너편에 자리한 수암마을은 배가 없으면 바깥으로 나갈 방법이 전혀 없는 마을. 뒤에는 험한 산이 버티고
있고, 앞에는 드넓은 호수가 펼쳐져 있다. 집은 10여 채 정도이지만, 대부분 찌그러진 빈집이고, 네 가구만 사람이 산다. 마을의 풍경만 보면
말 그대로 한 폭의 그림 같다. 하지만 정작 여기 사는 사람들은 매일 보는 풍경이라 그런지 그저 그렇고 그렇다는 반응이다. 뱃삯은 한번
이용하는데 2~3만원. 한익종 할아버지에 따르면 ‘신간이 펜해서’ 그나마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 곳 수암에서는 지리적 불편으로 인해 아직도
확독이 유용하게 쓰인다. 이 확독으로 수암마을 사람들은 깨도 갈고, 옥수수도 갈고, 고추도 찧어 먹는다. 방앗간이 멀기 때문에 확독이 아직도
유용한 생활도구로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교통이 불편하고 농사짓기가 불편한 마을이지만, 수암마을의 좋은 점은 너무도 많다. 주민들에 따르면,
우선 마음이 편하니까 좋고, 도둑 들 걱정이 없으니 좋고, 이웃이 단촐하니 서로 너나없이 정을 나눌 수 있어 좋고, 시끄러운 차소리를 듣지 않아
더 좋다는 것이다. 최소한 음풍농월은 아니더라도 안빈낙도는 되는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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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안날 건너편인 운암면 입석리에 자리한 양요정은 조선시대 선조 25년인 1592년 양요당
최응숙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난을 피해 낙향하여 건립한 누각이다. ‘양요’는 ‘인자요수 의인요산’(仁者樂水 義人樂山)에서 나온 말로 어진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의로운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누각의 이름처럼 산과 강이 기막히게 어울리는 곳에 정자를 지었다. 예부터 경치가 빼어나
많은 시인 묵객이 시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지금은 이 정자를 찾는 이가 별로 없는데, 아마도 주변의 울창한 나무와 숲에 가려 바깥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정자가 숨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양요정은 훨씬 운치 있고 적막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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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용차로 외안날이 있는 용운리로 가려면,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전주 인터체인지로 빠져 27번 국도를 타고
내려가다가 운암호 순환도로를 만나면 용운리 쪽으로 좌회전해서 들어간다. 순환도로를 타고 가다보면 용운리 들어가는 길이 나오고 길을 따라가다 두
갈래길이 나오는데 왼쪽이 내마촌이고, 오른쪽이 용동이다. 외안날은 내마촌에서 배를 타고 들어간다. 운정리 수암에 가려면 27번 국도를 타고 가다
운암대교가 나오면, 다리를 건너지 않고 우회전해서 가는정까지 간 뒤, 좌회전하여 들어가면 장자골과 범호마을이 나온다. 수암은 장자골이나
범호마을에서 배를 타고 건너간다. 먹을 곳과 잘 곳은 운암대교 주변에
많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