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글/이 용한(시인) 사진/안 홍범(사진가) |
||
마치 시간 여행이라도 떠나는 듯 우리가 탄 차는 복잡한 도로를 벗어나 한적하기 이를 데 없는 구불구불한 산길로 접어든다. 산자락에는 돌투성이 비탈밭에 성기게 세워 놓은 옥수수가리들. 낮은 지붕마다 높은 산그늘을 이고 저녁 연기를 피워 올리는 집들. 산이 깊은 만큼 빠르게 일몰이 들이닥치는 두메마을들. 별어곡, 자미원, 예미, 여량, 화절령, 몰운. 들을수록 정겨운 이름들. 하지만 한겨울 강원도의 산과 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아름답다는 생각보다는 애틋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런 애틋한 풍경 속을 달려 정선군 동면 화암리에 도착한 것은 이미 별이 초롱초롱한
밤중이었다.
동면 화암리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물 좋기로 소문난 화암약수로 속을 달랜 뒤, 아침 일찍 무치재를 넘는다. 무치재는 화암동굴이 있는 천팔십삼 미터의 각희산을 오른편에 낀 높고 험한 고개이다. 몇 년 전만 해도 트럭 한 대 정도 다닐 만한 똬리 같은 비포장길이 산 너머 북동리까지 이어져 있었으나, 얼마 전부터 도로확장 공사에 들어가 포장길이 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어쨌든 아직까지는 먼지 폴폴 날리는 비포장길인 데다 고개 꼭대기부터는 공사의 손길이 닿지 않아 옛길의 정취를 한껏 맛볼 수 있다. 구불구불 무치재를 넘어서면 북동리. 과거(일제시대) 마을을 굽어보고 있는 무치재에는 금광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하는데, 한창 금광이 잘 나갈 때 이 마을에는 마치 도회지처럼 빼곡이 집들이 들어차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비가 와도 무치재에서 아랫마을까지 비를 안 맞고 내려왔다"는 말이 전해 오고 있다. 무치재부터 집이 다닥다닥 들어차 비를 피할 추녀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북동리는 그 많던 집들이 하나 둘 사라져 지금은 서른 가구가 조금 넘는 마을로 탈바꿈하였다. 마을로 들어서 얼마쯤 내려가자 태극기가 내걸린 작은 분교가 나왔다. 사백이십사 번 지방도로를 벗어나 비포장길로 오 킬로미터를 달려서 만난 화동초등학교 북동분교. 학교 운동장에는 아직 수업이 시작되지 않았는지 아이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왁자하게 뛰어놀고 있다. 이곳의 학생은 모두 열 명. 세 명의 미취학 어린이가 언니 오빠와 함께 학교에 오는 것까지 치면 열세 명의 아이들이 있는 셈이다. 북동분교에서는 모두 두 개의 학급을 운영하고 있는데, 일학년부터 삼학년까지 저학년은 밝은달반, 사학년부터 육학년까지 고학년은 푸른솔반이다. 이곳의 선생은 두 분. 스물 아홉 살의 유 재학 씨와 스물 여섯 살의 윤 은환 씨. 둘은 영화에나 있을 법한 작은 분교의 부부 교사이다. "두메산골 분교 생활이 어떻습니까?" 흔한 물음에 유 재학 씨는 한마디로 "재미있죠 뭐"라고 대답했다. "오고 싶어서 온 겁니다. 강원도 산골로 오려고 옛날부터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북동분교로 오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여기 아이들이 순수하고 착해서 좋아요." 사실 이곳의 아이들은 오락실에 가 본 적도 학원에 다녀 본 적도 없는 아이들이다. 도시의 아이들이 문화의 혜택을 한껏 받고 자랄 때, 이 아이들은 부모를 도와 모판을 나르고 비탈밭의 잡초를 뽑으며 소중한 땀의 가치를 스스로 체험하고 있다. 또한 여름에는 개울가에서 겨울에는 산비탈의 눈밭에서 뒹굴며 자연이 가져다 주는 혜택에 고마워하는 법도 배운다. 학원에 다니지 않고도 도서관에 가지 않고도 지식보다 훨씬 값진 자연의 순리를 배우고 있는 것이다. 학교를 둘러보는 동안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땡땡땡땡. 아직도 종을 쳐서 아이들을 불러모으는 학교가 이곳에 있다니! 학교 운동장을 나와 우리가 가고자 하는 함바위골을 물어 보니, 아직 반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오 킬로미터 넘게 더 가야 한다는 얘기. 마을을 거의 빠져 나갈 때쯤 계곡을 따라 난 길은 두 갈래로 갈렸다. 여기서 함바위골은 오른쪽 골짜기를 따라가야 한다. 여름에 물이 흘렀음직한 계곡은 건조하게 말라붙어 있다. 이곳의 계곡은 이른바 "건천"으로 조금만 가물어도 물이 마른다. 하지만 여름 장마철이 되면 이 계곡은 물난리가 날 정도로 수량이 많아진다고 한다. 해서 여름 장마철에 함바위골에 가는 것은 엄두도 낼 수가 없다. 길은 이 건천을 여러 차례 가로질러 끊어질 듯 이어져 있다. 한참을 달려도 집이 보이지 않는다. 이따금 들려오는 소리라곤 까마귀 소리가 전부다. 만일 나무에게도 영혼이 있다면 그 영혼의 소리도 들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얼마쯤 달렸을까. 눈앞에 집이 한 채 보였다. 처음 출발한 곳으로부터 비포장길로만 십이 킬로미터. 그러니까 삼십 리를 달려서 함바위골에 닿은 것이다. 함바위골에서 처음으로 만난 집은 조 용선 씨네 집. 그이는 오십 년째 이 마을에 산다고 했다. 그이에 따르면, 함바위골에 있는 집은 모두 다섯 채. 하지만 세 가구는 농사철에 들어왔다가 겨울이면 빠져 나가 빈집이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실제로 함바위골을 꾸준히 지키고 있는 집은 단 두 집인 셈이다. 조 용선 씨네와 더불어 함바위골을 지키는 또 다른 집은 최 재규 씨네 집. 역시 최씨도 오십 년 넘게 이 골을 떠나지 않고 있다. "삼척에 살다가 조실부모하고, 먹고 살려고 여기 들어와 삽니다." 최씨네 집에는 특이한 물건이 두 가지 있다. 멧돼지 사냥에 쓰던 투창과 새나 동물을 쫓을 때 쓰던 파대라는 것이다. 그이가 젊었을 때만 해도 멧돼지 투창은 흔하게 쓰던 것이었다. "삼십 년 전까지는 저거 마카 썼어요. 겨울에 눈이 오면 살피(설피) 신고 창 가지고 멧돼지 마이 잡으러 대녔어요." 그때 이 함바위골에만 백여 명에 서른일곱 집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화전정리사업을 펼치면서 이 골은 적막한 골이 되고 말았다. 우리 귀에는 낯선 "파대"라는 것도 그이가 어린 시절에 흔하게 보고 썼던 것을 다시 만들어 쓰는 것이다. 본래 파대는 지게 멜빵을 만들듯 짚을 길게 엮어서 만드는데, 그 길이가 삼 미터가 넘는다. 지금은 짚 대신 나일론 끈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최씨는 파대를 쳐서 새를 쫓을 만큼 많은 농사는 짓지 않고 있다. 기껏해야 강냉이와 "무꾸(무)" 농사가 전부. "떠나고 싶지 않으세요?" 어리석은 물음에 그이는 단호하게 "좋아서 사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여기가 조용하지, 공기 좋고, 물 좋지. 안 좋은데 억지로 살겠소? 요 우에 가면 옻샘이 있어요. 피부병 있는 사람이 먹고 씻으면 병원에 가 못 고치는 병도 다 고쳐요. 이런 좋은 데가 어디 있소." 이곳이 불편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단지 바깥에 사는 우리의 생각일 뿐, 그네의 생각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계곡과 너와집, 단임마을
포장이 안 된 길을 달리는 동안 우리가 탄 차는 여러 차례 땅바닥을 들이받았다. 이런 곳에서는 아무리 조심을 해도 소용이 없다. 하지만 차창 밖으로 보이는 단임골 풍경은 그지없이 아름다웠다. 하긴 사람들은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가만 놔두지 않는 못된 습관이 있다. 단임골을 휴식년제로 묶어 둔 까닭을 그제서야 알 것 같았다. 단임마을은 단임골의 비경이 끝나는 곳에 앞산 뒷산 산자락을 지붕 삼아 자리잡고 있다. 삼십삼 번 지방도변에 자리한 숙암분교로부터 비포장길을 달려 십이 킬로미터를 와서야 단임마을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단임마을에서 처음으로 우리와 맞닥뜨린 집은 본체가 귀틀로 된 너와집. 그러나 지붕 위에 푸른 천막을 씌워 놓아 더 이상 너와집이라 할 수 없는 너와집이었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비는 가려야겠고, 군청에서는 너와를 걷어 내지 말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천막을 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천막 안을 들여다보니 나무를 쪼개 올려놓은 너와가 거의 삭을 대로 삭아 있었다. 본래 너와집은 지붕에 기와나 이엉 대신 나무판을 덮은 집을 일컫는데, 보통 나무의 재료는 소나무나 전나무가 많이 쓰였다. 지붕이 나무 조각이기 때문에 뒤틀리고 사이가 떠서 빗물이 샐 것 같지만, 나무는 습기를 받으면 차분히 가라앉는 성질이 있어 물이 샐 염려가 없다. 그럼에도 단임마을 너와집이 비가 샌다는 것은 그만큼 수명이 다 됐다는 얘기다. 옛말에 "너와 백년"이라 하여 너와지붕의 수명이 백년은 간다는 말이 있다. 또 "이왕이면 너와"라는 말도 있었는데, 이는 그만큼 너와집이 수명이 길고, 여름에는 시원하며, 겨울에는 따뜻했기 때문이다. 너와집을 벗어나 한참을 더 올라가자 동네 반장댁인 심 상복 씨네 집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다. 오늘이 반장댁 겨울 김장을 하는 날이란다. 혼자 살고 있는 심씨의 김장을 돕기 위해 "나무꾼의 아내"로 불리는 이 영광 씨의 아내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아무래도 김장이란 것은 모름지기 여인네의 손을 거쳐야 제 맛이 나는 법이다. 김장을 하는 동안 이 영광 씨는 마당 한켠에서 장작을 패고, 주인인 심 상복 씨는 부엌에서 일찌감치 점심 준비에 들어갔다. 심씨는 단임마을 토박이는 아니었다. 그이는 십몇 년 전에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이곳 단임골로 들어와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심씨의 경우처럼 단임마을 사람들의 절반 이상은 바깥에서 들어온 사람들이다. 심씨는 이곳에서 고랭지 채소와 약초 농사를 짓고, 토종벌을 치며 살아가고 있다. "올핸 벌이 잘 안 됐어요. 꿀 못 딴 통이 절반 넘어요. 솔잎혹파리약을 쳐서 그런가 봐요. 이 약이 워낙 독해서 수간주사 한 번 치고 나면 주변에 뱀이고, 해충이 싸그리 없어져요." 그이에 따르면 단임마을에는 모두 아홉 가구에 열네 명의 주민이 산다. 마을이 해발 칠백 미터쯤에 자리 잡고 있어 겨울이면 날씨가 대관령과 비슷한 영하 이십 도에서 삼십 도까지 내려간단다. 그러니 겨울에는 오로지 나무하는 게 일. 지금 그이가 살고 있는 집에는 다른 곳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성주(집안신 가운데 가장 높은 신)의 신체가 부엌에 남아 있다. 이곳의 성주는 무명 실타래와 한지를 접어 신체를 만들었는데, 부엌 대들보 아래 모셔져 있다. 아마도 처음 이 집이 지어질 무렵에 모신 듯하다. 본래 성주는 집을 새로 지을 때 대들보 아래 모신다고 하며. 마루가 없는 집에서는 조왕신과 더불어 부엌에다 모셨다고 한다. 김장 담그는 일이 어느 정도 끝나자 기다리던 점심이 나왔다. 김치와 된장국, 소금에 절인 곰취가 반찬으로 올랐고, 특별한 날답게 돼지고기도 나왔다. 위성 안테나 덕택인지 점심 식사를 하는 동안 집주인은 "타이거 우즈"가 나오는 골프를 틀어 놓았다. 그리고는 저 바다 건너편에 사는 우즈에 대해 두메산골의 노인은 이런 저런 여담을 늘어놓았다. 이 두메산골에서 타이거 우즈가 화제에 오를 줄이야! 정선의 여러 두메마을이 그렇듯 단임골에서도 위성 안테나 없이는 전혀 텔레비전을 볼 수가 없다. 도회지에서야 술집이다 노래방이다 오락실이다 놀 거리가 널려 있지만, 이 첩첩산중 적막강산에서는 그나마 텔레비전이 둘도 없는 놀 거리요, 위안인 셈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심씨의 이웃인 이 영광 씨는 북에서 내려온 귀순자라고 한다. 삼십삼 년 전 북에서 내려온 그이는 춘천 쪽에 살다가 십이 년 전에 이 마을로 들어왔다. "여긴 사람들이 별로 없으니, 부딪힐 염려가 없잖아요. 여기 자연이 너무 좋으니까, 마음이 편해요. 원래 내가 좀 귀가 안 좋아 환청이 있었는데, 여기 와서 많이 치료가 됐어요. 그래서 여기 계속 머물고 있어요. 여름에는 섬이나 바닷가 쪽을 좀 돌아다니고, 겨울에는 단임골에 머무는 거죠. 만약 여기까지 오염이 된다면 나는 이제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거예요." 그이에게는 어쩌면 이곳 단임마을이 삶의 마지노선인 셈이다. 디딜방아가 있는 안도전 마을 단임마을을 나와 임계면 도전리 안도전 마을에 도착한 것은 오후 세 시가 넘어서였다. 벌써 해는 노루꽁지만큼 서산에 걸려 산그늘이 마을을 뒤덮고 있었다. 강원도에 온 이상 한두 시간쯤 일찍 날이 저무는 것쯤은 감수해야 한다. 함바위골이나 단임마을에 견주면 안도전은 비포장길로 그리 오래 들어가지는 않는다. 도전리에서 십 리 가웃 들어가면 안도전이다. 그러나 길의 상태는 돌이 많아서인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마을은 해발 천이백 미터가 모두 넘는 수병산, 고적대, 중봉산을 병풍처럼 아우른 채 둥지를 틀고 있다. 특이할 것도 없지만, 이 마을의 집들은 모두 양철 지붕을 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예전 이곳의 집들은 삼대로 지붕을 인 겨릅집이 거개였는데, 새마을운동 시절에 싸그리 양철 지붕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집의 벽체는 흙벽이 대부분이고, 돌담이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집이 많다. 또 마을의 집들은 드문드문 떨어져 독가촌과 비슷한 산촌을 이루고 있다. "산촌"이라 함은 산마을이란 뜻이 아니라 집이 뚝뚝 흩어져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농사래야 뭐 무하고, 당귀하고, 강냉이 좀 하죠 뭐." 토종벌도 치고 있지만, 대여섯 통이 고작이란다. 운이 좋았을까. 탁 왈수 씨네 집에서는 아직도 디딜방아를 쓰고 있었다. 이 디딜방아로 이웃 사람들까지 와서 메주도 찧고, 고추도 빻고, 서숙과 강냉이도 찧는다. 명절 때면 디딜방아로 쌀을 찧어서 떡을 하는데, 방앗간 기계로 빼는 떡과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쫄깃하고 맛있다고 한다. 탁 왈수 씨네말고도 안도전에는 디딜방아를 쓰는 집이 한 집 더 있다. 바로 안 교원 씨네 집이다. 안 씨는 사대째 이 동네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토박이다. 그이도 부엌에서 쇠죽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을에 빈집이 많네요"라고 하자 그이는 옛날 생각이라도 나는지, 살풋 눈을 감았다. "여기 육십오년돈가 그때까진 마을에 백 호가 넘게 살았어요. 저 위 골짝으로 다 사람들이 살았으니까. 그러다 육십팔년돈가 울진사건 나고 많이 나갔죠 뭐. 산속의 집을 막 태우고 그랬으니까. 공비 왔을 때 일루 오고 말구요. 그전에는 여기가 삼척 땅이요. 삼십 년 전까지는 삼척땅이었어요. 그때만 해도 이 동네 집들이 다 겨릅집이었어요. 지금은 뭐 삼 심기도 워낙에 까닭시러워서, 삼을 신고하고 심잖어요. 단속도 얼마나 센지, 지금 겨릅이 어딨어요." 상상을 해 보라. 백여 집이 넘는 겨릅집마다 모락모락 저녁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아마도 안씨는 그런 옛날 안도전의 풍경을 그려보았던 모양이다. 겨릅집이 양철지붕이 되긴 했어도 저녁 연기가 피어오르는 안도전의 풍경은 여전히 옛
고향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문제는 언제부턴가 여름이면 안도전을 찾는 사람이 하나 둘 늘고 있다는 것이다. 산속 깊이 박혀 있는 마을이지만,
계곡물이 좋고 주변 경치 또한 좋기 때문인데, 그런 까닭으로 중간중간 마을길을 넓히는 공사까지 벌어지고 있다. 단임골이 제 모습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라 하겠다. 뼝대로 둘러싸인 연포마을 우리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신동읍 덕천리 연포마을. 연포로 가기 위해 우리는 정선과 평창을 잇는 사십이 번 국도에서 동강을 따라 난 강변 길로 접어들어 물굽이를 따라 내려갔다. 안개에 뒤덮인 동강 줄기와 산자락은 살풋 안개가 뒤덮여 이 세상과는 다른 세계로 보였다. 이리 꺾이고, 저리 휘어지면서 마치 절창으로 불러 젖히는 아라리가락처럼 멋들어진 굴곡을 내리 펼쳐내는 동강.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영월댐 문제는 일단 "백지화"로 돌아섰지만,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댐을 하느니 마느니로 세월을 보내는 동안 동강 주변 농가의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주민들은 또 다시 목청을 높여 생존권 투쟁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동강변 곳곳에서는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는 플래카드를 흔하게 만날 수가 있다.
지난날 동강변 마을에서는 겨우살이 준비의 하나가 이 나무다리와 섶다리를 놓는 것이다. 찬바람이 나는 십일월이면 마을 사람들이 다 모인 가운데 마을 잔치처럼 다리를 놓고, 다리밟기 놀이까지 한바탕 펼쳤다. 하지만 동강에서도 이제 이런 다리를 만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 되고 말았다. 연포마을을 가려면 새롭게 포장도로가 생긴 고성리에서 험한 물레재를 넘어가야만 한다. 얼마 전까지 이 길은 군데군데 비포장길이었으나, 한 달 전 깨끗한 시멘트 길로 바뀌었다. 고성리에서 물레재를 넘으면 소사. 소사에서 다시 강을 건너야 연포에 닿을 수 있다. 고성리에서 약 오 킬로미터 정도. 지난해까지만 해도 연포에 가려면 배를 타야 했지만, 올해는 여울을 막아 흙다리를 놓았다. 연포에 이르러 가장 먼저 우리가 만난 것은 비오리떼. 어림잡아 셈을 해 보니 이십여 마리 정도였다. 동강을 따라 내려오는 동안 귤암리에서도 운치리에서도 비오리를 만났고, 연포에서 또다시 비오리를 만난 것이다. 그러나 사진기가 자신들에게로 향하는 것을 눈치채자 비오리는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라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사람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는 것을 이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마을을 한바퀴 도는 동안 다슬이와 영준이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마을을 떠나기에 앞서
연포상회를 다시 들렀는데, 때마침 "까까 할머니"가 와 있어 우리는 아이들에게 아까부터 먹고 싶었다는 사탕을 한 봉지씩 사 주었다. 그리고는
아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우리가 마을을 아주 돌아설 때까지 아이들은 조금 전에 사 준 사탕을 열심히 흔들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삼박사일
동안의 정선 두메마을 나들이는 끝이 났다. 나흘 동안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마치 아주 먼 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이천년이란 시간대를 벗어나 천구백칠십년대로 거슬러 올라간 것처럼. 거기에는 다른 지층 연대가 존재하고 있었다. 물레재 위에 한 뼘쯤 걸려
있는 해. 저 해가 떨어지고 나면 우리는 다시 서울이라는 익숙한 공간에 가 있을 것이다.
|
'첩첩·두메산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오지마을: 우묵한 오무마을과 전기없는 내원동 (0) | 2007.01.07 |
---|---|
[스크랩] 오지마을: 첩첩산중 물레방아 마을-한소리 (0) | 2007.01.07 |
[스크랩] 호수에 갇힌 섬마을: 임실 외안날과 수암마을 (0) | 2007.01.07 |
[스크랩] 충주호 에움길 따라: 며느리산마을 가는 길 (0) | 2007.01.07 |
[스크랩] 정선 단임마을과 벗밭 (0) | 2007.01.07 |